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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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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 군인이자 정치가로 활동하며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군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 혁명 시기에 군인으로 임관하여 툴롱 포위전에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군사적 능력을 입증하고,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통령이 되었다. 통령 시절에는 내정 개혁을 통해 프랑스의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켰으며,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다. 1804년에는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스페인 독립 전쟁 등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1814년 퇴위 후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이루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지만, 과도한 권력욕과 무리한 전쟁으로 비판받기도 하며, 나폴레옹 법전, 행정 개혁, 교육 개혁 등 근대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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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군사 경력
30대 후반의 나폴레옹의 초상화. 고급스러운 18세기 가구와 서류들로 가득한 공간에 서 있다.
1812년, 튀일리궁의 서재에서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서명
나폴레옹 전투 지도
나폴레옹의 전투들. 세인트헬레나를 보려면 전체 화면 지도를 확대하십시오.
기본 정보
이름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출생 이름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
로마자 표기Napoléon Bonaparte
로마자 표기 (이탈리아어)Napoleone di Buonaparte
로마자 표기 (코르시카어)Napulione Buonaparte
별칭나폴레옹 1세
출생일1769년 8월 15일
출생지아작시오, 코르시카, 프랑스 왕국
사망일1821년 5월 5일
사망지세인트헬레나, 롱우드
매장일1840년 12월 15일
매장지레자발리드, 파리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통치 정보
직위프랑스 황제
첫 번째 재위 기간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6일
두 번째 재위 기간1815년 3월 20일 – 1815년 6월 22일
대관식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선임자제1통령
후임자루이 18세
후임자 (2차 퇴위 후)루이 18세
기타 직위이탈리아 왕, 안도라 공동대공
정치 경력
직위프랑스 공화국 제1통령
임기 시작1799년 12월 13일
임기 종료1804년 5월 18일
가족 정보
배우자조제핀 드 보아르네 (1796년 3월 9일 결혼, 1810년 1월 10일 이혼)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1810년 3월 11일 결혼, 1814년 별거)
자녀나폴레옹 2세 외 다수
아버지카를로 마리아 보나파르트
어머니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기타 정보
군대그랑드 아르메

2. 어린 시절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18] 출생 당시 이름은 Nabulione di Buonaparte|나불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it였으며,[7] 이는 요절한 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중에 가톨릭 세례를 받으며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 뿌리를 둔 하급 귀족 가문으로,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했다.[319][4]

아버지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는 피사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귀족회의 의원이었다.[320]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320] 나폴레옹의 부계는 대대로 법조인을 배출했고, 모계는 롬바르디아의 귀족 가문이었다.[4] 나폴레옹에게는 형 조제프와 여섯 명의 동생들(루시앵, 엘리사, 루이, 폴린, 카롤린, 제롬)이 있었다.[5]

나폴레옹이 태어날 무렵 코르시카는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에 맞서 독립 투쟁을 벌여왔고, 1755년 파스콸레 파올리의 주도로 코르시카 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1768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코르시카의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겼다.[321][8]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점령하려 하자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인들은 저항했으나, 1769년 5월 퐁트노보 전투에서 패배하며 독립의 꿈은 좌절되었다.[322]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했다.[323]

처음에는 파올리를 지지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카를로는 프랑스의 승리 이후 프랑스 측으로 전향했다.[322] 그는 코르시카의 새로운 프랑스 총독 샤를 루이 드 마르뵈프와 친분을 쌓고 그의 후원을 받았으며,[11][12] 1771년 9월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귀족 지위를 인정받았다.[323] 이후 카를로는 루이 16세의 궁정에 코르시카 대표로 임명되었고, 마르뵈프의 지원 덕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의 군사학교에 입학할 왕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13]

나폴레옹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어머니 레티치아였다. 그녀는 군인 집안 출신답게 엄격한 규율로 자녀들을 훈육했으며, 나폴레옹은 훗날 "아이의 미래 운명은 항상 어머니의 작품이다"라고 회고했다.[14]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어릴 때부터 병적인 거짓말쟁이 기질을 보였고, 그때마다 어머니에게 매질을 당하며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324] 귀족 가문 덕분에 나폴레옹은 비교적 좋은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7살 무렵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라틴어, 고대사를 배웠다.

1779년 1월(혹은 1778년 12월), 9살의 나폴레옹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형 조제프와 함께 프랑스 본토로 건너갔다.[325] 그는 먼저 오툉의 종교 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의 모국어는 이탈리아어 계통의 코르시카 방언이었기에 프랑스어 습득이 필요했다.[15] 그는 프랑스어에 능통해졌지만 코르시카 사투리 억양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철자법에 약했다.[17]

같은 해 5월, 나폴레옹은 브리엔 군사학교에 왕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784년 10월까지 수학했다.[276] 그는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18] 역사와 지리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코르시카 출신이라는 점과 사투리, 작은 키 때문에 동급생들에게 자주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다.[15] 이로 인해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이 되었으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나 루소의 저작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278] 학교에서는 코르시카 사투리 발음 때문에 '라파이요네'(la paille au nez|라 파이요네프랑스어, 짚 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부유한 귀족 자제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급한 성격에 싸움도 잘했다고 전해진다. 브리엔 시절 후반에는 열렬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이자 파올리의 숭배자가 되었다.[20] 어린 학생들을 이끌고 눈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일화는 그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예로 알려져 있으나, 나중에 유명해진 뒤에 퍼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19]

1784년 9월, 나폴레옹은 파리의 에콜 밀리테르(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277] 그는 이곳에서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지리, 역사, 문학 서적을 탐독했다.[21] 1785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2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쳐야 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저명한 과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주관한 시험을 통과하여 에콜 밀리테르를 졸업했다.[22][23] 이는 개교 이래 최단 기간 졸업 기록이었으며, 코르시카인 최초의 졸업생이기도 했다. 졸업 성적은 58명 중 42위였다.

3. 군사 학교 시절

1778년 12월, 9살의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와 함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프랑스 본토로 건너가 오탱에 있는 수도원 부속 종교학교에 입학했다.[325] 이곳에서 4개월간 프랑스어를 배운 뒤, 형과 헤어져 1779년 5월 브리엔 군사학교(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326][327][276] 브리엔 군사학교는 가난한 귀족 자제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코르시카 총독 마르뵈프 백작의 도움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328]

학교에서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사투리[279] 때문에 '짚 코'라는 뜻의 la paille au nez|라파이요네fra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았다. 이는 그의 이름 '나폴레오네'와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유한 본토 귀족 자제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말이 적고 친구가 거의 없었으며, 절약을 위해 독서에 몰두했다.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나 루소의 저작[278] 등을 즐겨 읽었다. 친구 중에는 훗날 그의 비서관이 되는 루이 앙투안 포브르 드 부리앵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급성질이고 싸움을 잘하는 면모도 보였다. 어린 시절 눈싸움에서 뛰어난 지휘로 승리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수학 교관 비세그르 밑에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0대 후반에는 소설가를 꿈꾸며 간헐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1784년 10월, 나폴레옹은 파리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276] 사관학교에는 기병, 보병, 포병 세 병과가 있었는데, 그는 인기 있는 기병 대신 포병을 선택했다.[277] 대포를 활용하는 전술은 훗날 그의 군사적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관학교 재학 중이던 1785년 2월 24일, 아버지 카를로가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나폴레옹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찍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포병 장교 임용 시험을 준비했다.[329] 보통 2년 정도 준비하는 시험이었지만, 그는 7개월 만에 시험을 준비하여 1785년 9월, 총 58명의 합격자 중 42등으로 합격했다. 일반적인 재학 기간이 4년인 파리 육군사관학교 과정을 불과 11개월 만에 마친 것은 개교 이래 최단 기록으로,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4. 군인 시절

1785년 16세의 나이로 포병 장교로 임관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코르시카의 독립 문제에 더 관심을 두었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179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다. 같은 해 툴롱 포위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이끌며 24세에 여단장으로 고속 승진하여 명성을 얻었다.[280]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잠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795년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사단장으로 승진하고 국내군 사령관이 되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281][282]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했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붕괴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 성공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높아진 인기를 경계한 총재 정부1798년 그를 이집트 원정으로 보냈다. 이집트에서 초기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의 패배로 고립되었고, 제2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등 프랑스 본국의 위기 상황을 접하자 1799년 군대를 남겨두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군인으로서 쌓은 명성과 권력을 바탕으로 같은 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총령 정부를 수립하고 제1통령이 되었다.

4. 1. 초임 장교 시절

1785년 9월, 16세의 나이로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나폴레옹은 같은 해 11월 3일 발랑스에 주둔 중이던 라페르 연대에 포병 장교로 부임했다.[330] 그는 마송 도트브리브 대위의 포격 중대에 배치되어 10주간 포병 수습 장교로서 기본 훈련을 받았다.[331] 훈련 이후에는 병사 관리, 수학, 포대 진지 구축, 화학, 물리학 강의 수강 등 비교적 여유로운 임무를 수행했다.[331]

군 복무 중 시간적 여유를 활용하여 독서에 매진했는데, 주로 역사, 철학, 포병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퇴근 후에는 소설을 습작하기도 했으며, 임관 후 첫 휴가를 받아 8년 만에 고향 코르시카를 방문하기도 했다.[332] 1788년, 라페르 연대가 오손으로 주둔지를 옮기면서 나폴레옹도 그곳에서 근무를 이어갔다. 그는 급여의 대부분을 고향집에 보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여 허름한 하숙집에서 지내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거나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332]

4. 2. 프랑스 혁명

코르시카 의용대 부사령관 시절(23살)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당시 오손(Autun)에 주둔하던 나폴레옹은 혼란을 목격했다. 민란으로 과세 대장이 불태워지고 총괄징세청부업자의 사무실이 파괴되기도 했으며, 8월에는 제헌의회에 의해 봉건제가 폐지되고[333]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334] 혁명 사상이 퍼지며 군대 내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335]

나폴레옹은 휴가를 얻어 1789년 9월 말 코르시카로 귀향했다. 그는 사면받고 돌아온 파올리와 함께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코르시카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피사 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형 조제프를 지방 의회 의원으로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고, 자신은 의용대의 부사령관이 되었다.[336][337] 당시 혁명 정부는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 의용군 모집과 현역 장교의 의용군 지휘관 겸직(이중군적)을 허용하고 있었다.[338]

그러나 코르시카의 실권자 파올리는 나폴레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가 과거 프랑스 측으로 전향했던 일 때문에 보나파르트 가문을 기회주의적으로 보았고, 나폴레옹의 지나친 접근도 경계했다.[339]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340] 파올리는 극단으로 치닫는 혁명을 비난하며 혐오감을 드러냈고,[341]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며 코르시카의 독립을 고려하고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은 국왕 바렌 사건과 혁명 전쟁 중 왕당파가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점 등을 보며 자코뱅주의 혁명을 지지했다.[341][342]

갈등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정부가 추진한 사르데냐 원정에 참여했을 때 파올리가 이를 교묘하게 방해하여 실패하면서 노골화되었다.[343] 파올리는 원정 성공 시 권력이 프랑스 혁명 정부와 나폴레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혁명 정부는 파올리를 의심하여 파리 출두를 명령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나폴레옹과 파올리 간의 알력 다툼은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으나,[344]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는 파올리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나폴레옹 측은 불리했다.[345] 1793년 5월, 파올리 측은 나폴레옹을 잠시 구금하고[346] 그의 집과 농장을 약탈했다. 나폴레옹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코르시카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347]

무일푼 피난민 신세로 툴롱 항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는 자코뱅파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 정치가 한창이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귀족 출신이라 위험할 수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남동생 뤼시앵이 자코뱅 클럽의 주요 일원이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348] 그러나 곧 툴롱에서 왕당파 반란이 일어나자, 보나파르트 가족은 마르세유로 거처를 옮겼다. 나폴레옹은 니스에 있는 정규군에 복귀하여[349]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가족들은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등 여전히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348]

1793년, 루이 16세 처형을 계기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 내 왕당파는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해군 기지가 있는 툴롱을 왕당파가 장악하고 8월 27일에는 영국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여 혁명 정부를 위협했다.[350] 혁명 정부는 툴롱 탈환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무능한 지휘관들로 인해 고전했다. 당시 포병 대위였던 나폴레옹은 전투의 승패를 가를 요충지인 레기에트와 발라기에 요새 점령 작전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51]

지리한 공방전이 3개월간 이어진 후, 12월이 되어서야 나폴레옹의 작전이 승인되었다.[352] 48시간의 포격 후 이어진 백병전 끝에 프랑스 군은 12월 18일 새벽, 두 요새를 탈환했다.[353] 이 요새들은 툴롱 내항과 외항을 차단하여 적의 보급을 끊고 고립시킬 수 있는 전략적 위치였다.[354] 영국과 스페인 함대는 황급히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지만[355] 군인으로서 첫 무훈을 세웠다.[356]

툴롱 포위전 승리의 공적을 인정받아 나폴레옹은 중령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여 24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357][358][359] 이는 3개월 만의 고속 진급이었는데, 혁명에 반대한 귀족 출신 장교들의 대거 망명으로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임관 후 4년간 내륙에서만 근무했지만, 고향 코르시카에서 4년간 활동하며 항구와 요새 지형을 면밀히 연구하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국민공회에 제출한 경험이 있었다.[360] 이러한 포병 장교로서의 관심과 노력, 그리고 툴롱의 지형이 고향 아작시오와 놀랍도록 유사했던 점[361] 등이 그의 전략적 성공에 기여했다.

4. 3. 툴롱 포위전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기로 1793년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 군주들은 왕 없이도 국가 통치가 가능하다는 혁명 사상, 즉 민주주의가 자국민에게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 혁명 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했고, 이에 맞춰 프랑스 내 왕당파도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혁명 정부는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다. 특히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가 있는 툴롱을 장악한 왕당파는 혁명 정부의 진압군에 맞서기 위해 8월 27일, 대불동맹 소속인 영국과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여 정부를 위협했다.[350]

툴롱항은 프랑스 해군의 중요 해군 기지이자 지중해 통제의 핵심 요충지였기에, 혁명 정부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1793년 9월, 정부군이 툴롱 탈환을 위해 투입되었으나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고전했다. 당시 포병 대위였던 나폴레옹은 전략상 가장 중요한 레기에트와 발라기에 요새 점령 작전을 제안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51]

사령관이 두 차례나 교체되는 동안 3개월간 지루한 공방전만 이어졌고, 12월이 되어서야 나폴레옹의 작전이 승인되었다.[352] 48시간 동안의 집중 포격 후 이어진 백병전 끝에, 프랑스 군은 12월 18일 새벽 레기에트와 발라기에 요새를 탈환했다. 이 요새들은 툴롱 내항과 외항을 차단하여 외부 보급을 끊고 내항의 적을 고립시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354] 요새 함락 소식에 영국과 스페인 군은 황급히 철수했다.[353] 나폴레옹은 이 전투 중 백병전에서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으나[355], 군인으로서 첫 공훈을 세웠다.[356]

툴롱 포위전 승리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중령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며 24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357][358][359] 이는 불과 3개월 만의 고속 승진이었는데, 당시 혁명에 반대한 귀족 출신 장교들이 대거 망명하여 유능한 지휘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적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임관 후 4년간 내륙 지역에서만 근무하여 항구나 해안 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 코르시카에서 보낸 4년 동안 항구 주변과 요새를 면밀히 연구했고, 관련 보고서를 국민공회에 제출하기도 했다.[360] 포병 장교로서 주요 전략 요충지를 파악하고, 상륙전이나 방어전에서 포병대를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운용하는 데 대한 깊은 관심과 노력은 툴롱 포위전에서 그의 능력이 발휘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고향 아작시오와 툴롱의 지형이 놀랍도록 유사했던 점도 행운으로 작용했다.[361]

4. 4. 왕당파 폭동 진압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하는 정부군


무능한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자코뱅파는 공포정치를 펼쳤다.[362] 자코뱅파의 지도자 격인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성과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반혁명 세력뿐 아니라 온건파와 반대파까지 단두대로 보내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이 기간 동안 파리에서만 약 15,000명이 처형되었다.[363]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처형했다.[364][365]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모함을 받아 8월에 잠시 투옥되었다.[366] 곧 풀려났지만, 좌천성 발령에 항의하다가 직위 없이 파리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367] 그러던 중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왕당파가 일으킨 폭동은 나폴레옹에게 기회가 되었다. 새로 집권한 테르미도르파가 제정한 《3분의 2법》으로 인해 선거에서 불리해진 왕당파가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당시 실력자였던 바라스의 요청으로 나폴레옹은 폭동 진압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약 2만 명의 무장 폭도를 상대로 산탄이 장전된 대포를 발사하는 과감한 전술을 사용하여[368] 신속하게 폭동을 진압했다. 이 공로로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정보부 책임자 겸 파리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69]

4. 5. 이탈리아 원정

아르콜 다리 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6년, 27세가 된 나폴레옹은 드지레 클라리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공포 정치 아래 처형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의 미망인이자 폴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했던 조세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 같은 해, 총재 정부 총재 폴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간섭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환으로, 총재 정부는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 방면에서 공격을 계획했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 공격을 책임지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자 전환점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혼란이 지속되며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던 상황이었다.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 방면 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고전한 것과 달리,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는 눈보라 치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를 빠르게 제압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283]

1797년 4월, 나폴레옹군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근처까지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오스트리아와 강화 협상에 들어갔고,[370] 같은 해 10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으며,[370]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에 광대한 영토와 여러 위성국(자매 공화국)을 건설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크게 높아졌다. 프랑스로 귀환하는 길에 라슈타트 회의에 의례적으로 참가했으며, 12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정복당한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커져, 프랑스제 성냥조차 사용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4. 6. 이집트 원정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이탈리아 원정에서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총재 정부는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을 프랑스 정치 중심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영국과 식민지 인도를 잇는 길목인 이집트를 장악하여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284]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약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원정길에 올랐다. 7월에는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하여 현지 세력을 격파하고 카이로로 진격,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하며 카이로에 입성했다.[370] --

이집트 원정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약 180명의 학자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 동식물, 역사, 풍속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고대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 로제타석이 발견되었다.[371] 로제타석의 비문은 훗날 1822년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전히 해독되었으나,[372][373] 이 중요한 유물은 1802년 영국군에게 넘어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374][375]

그러나 육지에서의 승리와는 별개로, 해상에서는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나폴레옹이 카이로에 입성한 직후인 1798년 8월,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패배로 프랑스 해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었고,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798년 12월, 영국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 본토가 다시 위협받게 되었다.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이탈리아 북부를 되찾는 등 전황이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프랑스 국내에서는 총재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나폴레옹은 시리아로 원정을 시도했으나 악코 요새 공략에 실패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 본국의 혼란과 이집트에서의 어려운 상황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1799년 8월, 남은 병력의 지휘를 부관인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비밀리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향했다.[285] 그의 갑작스러운 귀국은 군대를 남겨두고 왔다는 점에서 '적전 도주'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당시 총재 정부의 무능함에 실망했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귀환을 영웅의 귀환으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했다.

5. 브뤼메르 쿠데타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중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 삼아 프랑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해군은 아부키르 만 전투에서 호라시오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배하였고,[376] 프랑스 지중해 함대의 주력이 전멸했다.[371] 이 패배로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고립되었다. 한편, 프랑스가 제2차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연패하며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클레베르 장군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기고, 총재정부의 명령 없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1799년 10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371]

나폴레옹의 무단 귀국은 군무 이탈에 해당했으나, 당시 총재정부는 이를 처벌할 힘이 없었으며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371] 나폴레옹은 총재정부의 주요 인물인 시에예스와 쿠데타를 공모하였고, 동생이자 오백인회 의장이었던 뤼시앵과 외무장관 탈레랑의 도움을 받았다. 1799년 11월 9일(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377]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기존의 헌법을 폐기한 뒤, 3명의 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통령 정부 헌법을 제정했다. 이 새 헌법은 1800년 2월 7일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378]

투표 결과는 찬성 300만 표, 반대 1,567표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나,[379] 이 투표는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재산 제한 선거로 인해 유권자 수가 약 70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그중 다수가 기권했으며, 비밀 투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앵에 의해 투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80]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고, 이로써 30세의 나이에 프랑스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다. 통령 정부는 형식상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었다. 제2통령은 법무를, 제3통령은 재정을 담당했지만 이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내정, 외교, 군사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막강한 권한은 제1통령이 행사했다.[381]

6. 통령 시절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선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영국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예정되었던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1798년 8월, 프랑스 해군은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크게 패배했고,[376] 지중해 함대의 주력이 거의 전멸했다.[371] 이 패배로 영국 해군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나폴레옹과 원정군은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프랑스가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클레베르 장군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기고 혁명 정부의 명령 없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1799년 10월 프랑스로 돌아왔다.[371]

나폴레옹의 이러한 행동은 군법상 탈영에 해당했지만, 당시 총재정부는 이를 처벌할 힘이 없었으며 프랑스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371] 나폴레옹은 총재정부의 권력자 중 한 명인 시에예스와 손잡고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는 동생이자 오백인회 의장이었던 루시앵과 외무장관 탈레랑의 도움을 받아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의회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오백인회가 이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377]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기존 헌법을 폐기했으며, 3명의 통령을 두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1800년 2월 7일 국민 투표에 부쳤다.[378] 투표 결과는 찬성 약 300만 표, 반대 1,567표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379] 하지만 이 투표는 재산 제한 선거였고, 약 700만 명의 유권자 중 다수가 기권했으며, 비밀 투표가 아니었다. 또한 투표 결과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동생 루시앵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비판이 있다.[380]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고, 불과 30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했다. 통령 정부는 명목상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었다.[381]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담당했지만, 제1통령은 내정, 외교, 군사 등 핵심 권한을 모두 가졌기에 다른 통령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6. 1. 대불동맹 전쟁

알프스를 넘고있는 나폴레옹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통해 통령 정부를 수립하고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했다.[377][378][381] 그는 집권 후 영국, 오스트리아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하던 국가들에게 강화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산베르나르 고개 (Great St Bernard passeng)[382]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 군대가 넘은 적 없는 험준한 길이었기에 부관들은 반대했지만,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하며 계획을 밀어붙였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의 군대는 성공적으로 알프스를 넘었고,[383][384] 같은 해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385][386] 이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받아들여 라인강 일부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넘겨주었다. 이 강화 조약으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내 정치 상황 변화 등으로 전쟁 지속이 어려워지자, 1802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 조약을 체결했다.[385]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약 10년 만에 유럽 대륙에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6. 2. 개혁 작업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했으며, 혁명기에 큰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을 회복시키고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썼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387]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387] 또한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고, 교통망 정비에도 노력했다.

국내 법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즉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388] 이 법전은 각 지역의 다양한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법 앞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전이었다.

6. 3. 대미 관계 개선

유사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프랑스 간 충돌이 잦았던 카리브해 지역


미국 프리깃함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과 프랑스 프리깃함 랭쉬르장트(L'Insurgente)의 교전 장면 (유사전쟁)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전, 프랑스는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환으로 1793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1778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미국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를 도와 영국 등 동맹국에 맞서 싸울 의무가 있었으나,[390] 신생 독립국으로서 유럽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다.[390]

그러나 영국은 미국이 중립적 지위를 이용해 프랑스와 교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해상 봉쇄하고 있던 영국은 미국의 중립 교역이 봉쇄망을 무력화시킨다고 보았고, 미국과 프랑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미국 상선 수백 척을 나포했다.[389] 결국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미국은 1794년 영국과 다소 굴욕적인 내용의 제이 조약을 체결하여 관계를 개선했다.[389]

동맹이었던 미국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긴 프랑스 총재정부는 외교적 보복에 나섰다.[391] 프랑스는 미국이 새로 임명한 공사의 부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관계 개선을 위해 파견된 미국 대표단에게 1778년 조약의 폐기를 전제로 막대한 차관과 뇌물을 요구했다.[392] 이 사건은 이른바 'XYZ 사건'으로 알려지며 양국 관계를 준 전시 상황으로 몰고 갔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양국 해군은 해상에서 산발적으로 충돌하고 상대국 상선을 나포하는 유사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집정관이 된 나폴레옹은 북미 루이지애나를 기반으로 새로운 프랑스 식민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393]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해야 했는데, 대규모 원정대 파견을 위해서는 카리브해의 제해권 확보와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1800년, 프랑스와 미국은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eng)을 체결하여 1778년 조약을 공식적으로 파기하고 양국 간의 갈등을 마무리 지었다.[394]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었고, 나폴레옹은 아이티 원정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6. 4. 아이티 침공



나폴레옹은 북미 루이지애나를 인수하여 새로운 프랑스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393]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해야 했고, 원정대 파견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1800년 몰트퐁텐 조약을 체결하며 양국 간의 갈등을 마무리 지었다.[394]

관계 개선 이후,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 약 3만 명의 원정대를 아이티(당시 생도맹그)에 파견하여[395] 식민지를 다시 점령하고 노예제를 부활시키려 시도했다.[396] 카리브해에 위치한 아이티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커피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주요 식민지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1789년)의 영향을 받아 흑인 노예들이 1791년부터 투쟁을 시작했고, 1794년에는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으며, 1801년에는 독립을 선언한 상태였다.[397]

프랑스 원정대는 초기에는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했으나, 결국 1803년 11월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 황열병의 창궐,[398] 그리고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였다. 특히 황열병은 프랑스군에게 치명적이었는데,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이 질병으로 인해 원정군은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399][400] 초기 파병된 33,000명 중 프랑스로 살아서 돌아온 병사는 3,000명에 불과했다.[401] 또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선박의 접근을 강력하게 차단하자 프랑스는 추가 병력 파견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이티는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으며,[402]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되었다.[403] 이로써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고, 노예제 폐지를 법으로 명시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이 북미 대륙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중남미 지역의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6. 5. 루이지애나 매각

푸른 부분이 당시 매각한 루이지애나 영토


나폴레옹은 원래 아이티를 점령한 뒤, 이를 발판 삼아 북미 대륙의 루이지애나에 프랑스 식민 제국을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404][393] 그러나 아이티 혁명 진압 및 점령에 실패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나폴레옹은 점차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사업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803년,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헐값으로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이티 점령 실패와 더불어, 당시 유럽에서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전체 교역량의 약 3분의 1을 미시시피 강을 통해 운송하고 있었는데, 뉴올리언스 항구 이용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루이지애나는 원래 스페인 영토였으나, 1800년 비밀리에 체결된 산일데폰소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소유권을 넘겨받은 상태였다.[405] 하지만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인수 절차를 밟기 전에, 현지를 관리하던 스페인 관리가 갑자기 미국 선박의 뉴올리언스 기항을 금지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406][407] 미국은 이미 1795년 스페인과 맺은 핑크니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 강 항해권과 뉴올리언스 기항권을 보장받은 바 있었다.

1803년 4월, 제임스 먼로가 이끄는 미국 사절단을 만난 나폴레옹은 예상치 못하게 루이지애나 전체 영토의 매입을 제안했다.[408] 협상 결과, 매각 대금은 1500만달러라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결정되었다.[409] 이 거래로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이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 6. 정교 협약

정교협약 문서에 서명 중인 나폴레옹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다.[410] 당시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15%를 소유하고, 프랑스 전체 GDP의 10%에 달하는 십일조를 거두고 있었다. 국민공회1790년 성직자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을 제정하여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 자산을 몰수했으며, 성직자들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했다. 예배는 금지되었고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되어 매각되었다.[412] 이로 인해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와 교황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브뤼메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약 400만파운드를 들여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고,[413] 1801년 교황 비오 7세와 정교협약을 체결했다.[424] 이 협약을 통해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교회의 활동과 예배의 자유가 다시 보장되었고, 나폴레옹은 가톨릭교회를 보호하는 입장을 취했다.[413] 또한 개신교도 인정하여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시키고자 했다.[411]

6. 7. 종신 통령

왕당파와 자코뱅 파[414]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415]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7. 황제 시절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자코뱅 파[414] 등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국내 정치 안정을 꾀했으나, 동시에 체제 전복 시도에는 가혹하게 대응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1804년 12월 2일에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423] 이는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약 10년 만의 일이었다.

철학자 헤겔(Hegel)은 예나 대학교 교수 시절 프랑스군이 예나에 입성했을 때,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를 유럽에 퍼뜨리는 세계 정신의 구현으로 보았다. 그는 “황제가…이 세계 정신이…정찰을 위해 말을 타고 풍족하게 도시를 나서는 것을 보았다. 이 인물이야말로, 이 한 지점에 집결하여 말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세계를 움켜쥐고 이를 지배하고 있다[310]”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시대는 몰락으로 향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지지부진했다. 프랑스에서는 복위한 루이 18세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커져갔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복위에 성공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신헌법(제국헌법 부가법)을 발표하고 비판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하며 연합국에 강화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고,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워털루 전투에서 완패하면서[293]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95일 만에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 압박을 받았고, 미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항구 봉쇄로 실패하고 영국의 군함에 항복했다.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폐하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은 베르트랑, 몽트롱, 가스파르 구르고, 라스 카즈 등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섬 중앙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지냈다. 고온다습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 보초병의 삼엄한 감시와 활동 제약 속에서 사실상 감금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측근에게 구술하여 방대한 회고록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삶뿐만 아니라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까지 담고 있어 후대의 “나폴레옹 전설”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섬 총독 허드슨 로우는 나폴레옹을 “보나파르트 장군”이라 부르고 상한 포도주를 대접하는 등 모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영국 정부가 나폴레옹의 황제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는 “장군”으로 호칭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러한 처사는 나폴레옹에게 큰 심적 고통을 주었다. 로우는 나폴레옹의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주치의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심적 고통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폴레옹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스페인 헌법 혁명과 그리스 독립 전쟁으로 유럽이 혼란한 가운데 1821년5월 5일 사망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해부되었고, 위에 궤양과 암이 발견되어 공식 사인은 위암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소에 의한 독살설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유해는 1840년 프랑스로 반환되었고(유해 반환),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최후의 말은 “프랑스! …군대! …군대의 수장에… 조세핀!”이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독살설'''은 임종 시 본인이 "나는 영국에 암살당한 것"이라고 말한 점, 유해 반환 시 시신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던 점(비소는 방부 효과가 있다), 스웨덴 치과의사 스텐 포르슈풋 등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에서 비소를 검출했다는 연구 결과 등에 근거한다. 비소 유입 경로로는 와인에 혼입되었다는 설과 당시 벽지에 사용된 비소가 공기 중으로 퍼져 흡입했다는 '''중독설'''이 있다. 그러나 머리카락의 비소 검출은 당시 보존제로 비소가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과학적으로 생전 섭취와 사후 보존제 사용을 구분하기 어려워 비소 중독설은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왕당파였던) 몽트롱 백작의 후손처럼 조상이 독살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사망 직후 발표된 '''위암설(병사설)'''은 여전히 유력하며, 최근 연구에서도 위암이 지적되었다.[294] 나폴레옹 가계에 위암 병력이 있다는 점([295] 가족성 위암 증후군)과 나폴레옹 자신이 위궤양으로 고생했으며 특히 1817년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해부 결과 위궤양으로 인한 천공과 초기 암이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암이 직접적인 사인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그 외에 20년 이상 전장을 누빈 극심한 스트레스가 심신을 망가뜨렸다는 설, 유배 생활의 심리적 압박과 생활 변화가 치명적인 위궤양을 유발했다는 설, 내분비 또는 뇌하수체 이상설 등도 제기되었다.

'''의료 과실설'''도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심장 병리학자 스티븐 커치는 주치의가 처방한 하제(안티몬산칼륨)와 구토제(감홍)가 감미료와 결합하여 맹독(시안화수은)으로 변했거나, 약물 과다 투여로 전해질 불균형을 일으켜 심정지를 유발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96][297]

결론적으로 나폴레옹의 정확한 사인은 현재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위암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7. 1. 제정 실시

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다비드, 루브르 박물관 소장


1803년 8월, 나폴레옹에 반대하며 부르봉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조르주 카두달과 왕당파들이 영국과 손잡고 나폴레옹 암살 음모를 꾸몄다. 프랑스의 피슈그뢰 장군과 모로 장군 등도 이 계획에 가담하였다.[416] 그러나 이 음모는 1804년 초 발각되어 카두달 등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417] 사건 배후에 영국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 내 여론이 들끓었고, 이는 나폴레옹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측근들은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했는데, 이는 암살 음모 발각을 계기로 권력을 영속화하고, 헌법상 세습 황제가 됨으로써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418]

이에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 여부를 국민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419] 1804년 7월 실시된 투표 결과, 찬성 3,572,329표, 반대 2,569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제정 수립이 가결되었다.[420][421][422] 하지만 당시 투표는 비밀 선거가 아니었고, 각 선거인이 자신의 선택 내용을 선거 대장에 기록하고 서명하는 방식이었기에 투표 결과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반영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420] 어쨌든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였다.[423] 이는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지 약 10년 만에 프랑스가 다시 군주제로 돌아선 사건이었다.

7. 2. 황제 대관식

1803년 8월, 나폴레옹에 반대하며 부르봉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조르주 카두달과 왕당파들이 영국과 손을 잡고 나폴레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프랑스의 피슈그뢰와 모로 장군 등도 이 계획에 가담하였다.[416] 그러나 이 음모는 1804년 초에 발각되어 카두달 등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417] 이 사건의 배후에 영국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내 여론이 들끓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나폴레옹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측근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했다. 암살 음모 발각은 권력의 항구화를 위한 좋은 명분을 제공했으며, 헌법상 세습 황제가 되면 부르봉 왕실에 의한 왕정복고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418]

이에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 여부를 국민 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419] 1804년 7월에 실시된 투표 결과, 찬성 3,572,329표 대 반대 2,569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국민 다수가 제정 수립을 받아들였다.[420][421][422] 다만, 당시 선거는 오늘날과 같은 비밀선거가 아니라 각 선거인이 자신의 선택 내용을 선거대장에 기재하고 서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투표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420]

국민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423] 이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지 불과 10년 만의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장소로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이용했던 랭스 대성당 대신 파리노트르담 대성당을 선택했다. 이는 자신이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니라, 위대한 로마 제국의 전통을 잇는 지도자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교황 비오 7세를 파리로 초청했다. 교황청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424] 교황은 직접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425] 즉위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대관식 당일, 나폴레옹은 교황이 씌워주려던 황제관을 스스로 집어 자신의 머리에 썼고,[426][427] 황후 조제핀에게도 직접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로 인해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게 축복 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7. 3. 파리 정비 사업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후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고자 도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가구 번호를 짝수와 홀수로 나누어 부여하는 새로운 계산법을 도입하고, 도시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으며, 묘지를 정비하였다. 또한 광장,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등 공공 시설을 정비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세웠다. 거리 곳곳에는 프랑스의 위인들의 동상이 세워졌고, 새로운 교량들이 건설되었다.

7. 4. 베토벤 교향곡 영웅

루트비히 판 베토벤1802년 빈 주재 프랑스 대사로부터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428]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 중인 교향곡 3번을 《보나파르트》라고 명명했다.[429]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탄식하며[430] '보나파르트'라고 적혀있던 악보의 표지를 찢어서 내팽개친 것으로 전해진다.[431] 헌정 또한 포기했으며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이 유명한 일화가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많다. 베토벤은 구체제 측 인물로 혁명파는 아니었지만, 줄곧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있었고, 제2악장이 영웅의 죽음과 장송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여, 감히 곡명을 변경하고 헌정을 그만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정설과는 반대로, 실제로 헌정하기 위해 면회를 청했지만 완전히 무시당했고, 그 분노로 제목을 바꾸고 위의 정설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는, 작곡가의 지위 향상의 갈림길 시대를 의식한 듯한 일화도 존재한다.

7. 5. 3차 대불동맹 전쟁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이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을 목표로 도버 해협 근처 브로뉴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맞서 영국은 오스트리아러시아 등을 규합하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프로이센은 중립을 표방했지만 영국, 오스트리아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확실한 중립을 확보하고자 영국으로부터 빼앗은 하노버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수도 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군대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군대가 합류하여, 나폴레옹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프랑스군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술을 발휘하여 프랑스군의 완벽한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며 항복했다. 이 전투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세 나라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三皇會戰)’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 개선문 건립을 명령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압도적인 승리로 프랑스 육군의 위상은 유럽 전역에 떨치게 되었다.

7. 6. 트라팔가 해전

1805년 10월 프랑스 해군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했다.[387] 이 패배로 프랑스는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였고, 결국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7. 7. 신성로마제국 해체

유럽 대륙 중앙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나폴리 국왕으로, 1806년 6월에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네덜란드 국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으로 삼음으로써 독일 지역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샤를마뉴 시대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7. 8. 대륙 봉쇄령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나폴리 국왕으로, 1806년 6월에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혔다. 또한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화함으로써 독일 지역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샤를마뉴 시대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피하였다.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베를린 칙령을 통해 대륙봉쇄령을 선포했다.[432] 이는 영국과의 모든 통상 및 통신을 금지하고, 영국 선박이 대륙 내 항구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위반하는 선박은 몰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통해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축인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굴복시키고, 프랑스의 대륙 경제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했다.[433]

그러나 대륙 봉쇄령은 예상과 달리 심각한 역효과를 낳았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품질 좋은 영국 공산품의 공급이 끊기자 유럽 대륙 전체에서 물자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밀수가 성행하였다.[434][435] 심지어 나폴레옹 자신도 군용 외투와 군화를 영국에서 밀수해야 할 정도였다.[436][437] 영국 역시 이에 맞서 면화, 향신료, 설탕, 커피 등을 싣고 대륙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의 항해를 해상에서 차단하는 역봉쇄 조치를 취했다.[435] 영국의 강력한 해상 봉쇄로 인해 생필품 부족 현상이 극심해지면서, 대륙 내에서는 오히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크게 고조되었다.

7. 9. 바르샤바 대공국

1806년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와 대립했다. 나폴레옹은 같은 해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크게 물리치고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피신해야 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하여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연이어 격파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영토를 크게 축소당했으며, 나폴레옹은 옛 폴란드 지역들을 모아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다. 또한 자신의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삼았다.

7. 10. 포르투갈 침공

포르투갈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하자 프랑스는 1807년 11월에 포르투갈을 침공했다.[438] 나폴레옹은 먼저 스페인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에 대한 분할통치를 협약한 뒤,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포르투갈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439] 침공이 시작되자 포르투갈 왕실은 귀족, 관리, 부유한 상인 등 약 1만여 명과 함께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도피했다.[440] 프랑스 군은 비교적 쉽게 포르투갈을 정복했으나, 점령 통치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441]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과 다시 힘을 모은 포르투갈 군대, 그리고 포르투갈 민중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결국 1808년 8월에 포르투갈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1809년과 1810년에 다시 포르투갈을 침공했다.[442]

7. 11. 스페인 점령

1807년 10월,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침공한다는 명분 아래, 주노 장군이 이끄는 2만 4천 명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의 동의를 얻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145] 이듬해인 1808년에는 약 10만[443]에서 12만 명[148]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에 주둔하며 사실상 스페인을 점령한 상태였다.

반도 전쟁 중 소모시에라 전투


나폴레옹의 형제인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스페인 국왕(1808~1813)


1808년 3월 18일, 무능한 왕실과 내각에 대한 불만과 프랑스군 주둔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왕세자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세력이 아랑후에스에서 반란(아랑후에스 폭동)을 일으켰다.[444] 이로 인해 국왕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으나, 카를로스 4세가 곧 퇴위를 번복하며 나폴레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재를 명분으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욘으로 불러들여 압박했고, 결국 5월에 두 사람 모두에게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바욘 퇴위).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했다.[443] 훗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위 찬탈이 정의롭지 못했으며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인정했다.[445]

나폴레옹의 왕위 찬탈과 프랑스군의 점령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대규모 봉기(5월 2일 봉기)가 일어났으나,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를 매우 잔혹하게 진압했다.[448] 이 사건은 스페인 전역으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 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6년간 이어지는 반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449] 스페인 민중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1808년 7월, 조제프는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국왕으로 선포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정규군이 바일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하자 마드리드에서 도망쳐야 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하여 비메이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신트라 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에서 철수했다.

''마드리드 항복을 받아들이는 나폴레옹'', 1808년 12월 4일


잇따른 패배 소식에 나폴레옹은 직접 이베리아 반도 원정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는 원정에 앞서 1808년 10월 에르푸르트 회의에서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와 만나 동맹 강화를 시도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시 러시아의 지원을 확실히 약속받지는 못했다.[146] 11월, 나폴레옹은 2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진격하여 비토리아에 도착했다. 프랑스군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12월 4일 마드리드를 다시 점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하여 1809년 1월 코루냐 전투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지켜본 뒤, 형 조제프에게 지휘를 맡기고 프랑스로 돌아갔다.[147]

나폴레옹이 떠난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1809년 4월, 아서 웰즐리(훗날의 웰링턴 공작)가 이끄는 영국군이 다시 파견되었고,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연합군은 프랑스군과 장기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동시에 스페인 전역에서는 격렬한 게릴라전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148] 끊임없는 저항과 영국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수렁에 빠졌다. 결국 프랑스군은 1813년 말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여 1814년에 완전히 물러났다.[450][148]반도 전쟁은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약 30만 명의 프랑스 정예 병력을 묶어두었으며, 15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 사상자를 낳았다.[148] 나폴레옹 자신도 훗날 이 전쟁을 "나를 망친 불운한 전쟁"이라고 회고했다.

7. 12. 중남미 지역의 독립

중남미 독립 무장 투쟁 (1810-1825)


300년간 이어진 스페인식민 통치중남미 지역에 경제적 수탈, 차별, 불평등으로 얼룩지며 현지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미국 독립 혁명프랑스 혁명, 그리고 루소몽테스키외 등에 의해 전파된 계몽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상은 식민지의 지식인들에게도 이미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451] 가장 많은 불만을 품은 계층은 상류층에 속하는 크리오요(식민지 출신 백인)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스페인 본토 출신인 페닌술라르(Peninsulares)들에 비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452] 양측간의 갈등은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크리오요(Criollo)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였다.

스페인이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게 완패하며 대서양 무역 독점권을 상실하자 남미 식민지에서는 스페인과의 무역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유럽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독립이 진행되었다.[453] 정치적인 독립투쟁의 불길을 당긴 사건은 1807년 나폴레옹포르투갈과 스페인 침공이었다.[454] 다음해인 1808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위를 찬탈한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자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정통성을 문제삼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455][456] 이런 권력의 공백은 1810년부터 중남미 지역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전개되도록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4세)으로부터 식민지 통치권을 양도받았으나[457] 식민지 독립투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지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456] 대륙봉쇄령에 맞선 영국의 해상봉쇄와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남미 국가별 독립연도


멕시코를 위시한 중미지역(누에바에스파냐)의 독립운동은 1810년 9월 16일 이달고 신부의 '돌로레스의 부르짖음'을 계기로 시작되었다.[458]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주축이된 이들의 봉기는 동조자가 10만명까지 불어나며 여러도시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전투경험도 없었고 훈련받지도 못했으며[459]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특히 상류층인 크리오요들은 이들의 활동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며 스페인군과 협력하였고 독립운동은 쉽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달고 신부는 1811년에 생포된뒤 처형되었다.[460]

이달고 신부에 이어 모렐로스 신부가[461] 투쟁을 주도하며[462] 독립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1815년, 스페인군에 생포된후 총살되었다. 이들의 순교는 이투르비테의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821년에 코르도바 조약을[463] 통해 멕시코와 중미지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464]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남부지역(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페루 부왕령)은 산 마르틴을 중심으로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고, 북부지역(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은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하에 15년간 진행된 무장투쟁을 통하여 1825년에 독립을 쟁취하였다. 브라질은 1822년에 포르투갈의 왕세자 동 페드루가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브라질 황제로 등극후 독립을 선포하면서 브라질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켰다.[465]

7. 13. 퐁텐블로 정교조약

교황 비오 7세나폴레옹 전쟁에 반대하며 중립을 지켰고, 대륙봉쇄령 지지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로마를 점령했고, 이듬해 5월에는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합병시켰다. 교황이 이에 반발하여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자, 나폴레옹은 교황을 체포하여 이탈리아 사보나에 유폐시켰다.[466] 이후 1812년 5월, 교황은 프랑스 퐁텐블로로 강제 이송되었고,[467] 1813년 1월 나폴레옹의 강요로 '퐁텐블로 정교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 조약은 교황이 교황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등 광범위한 양보를 강요하는 내용이었다.[466]

7. 14. 스웨덴 왕위 계승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베르나도트)


1809년 스웨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새로운 국왕이 즉위했지만, 그는 이미 나이가 많고 병약했으며 후사도 없었다. 게다가 사고로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마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스웨덴은 1810년 프랑스 육군 원수였던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에게 차기 왕위 계승을 제안했다.[468]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에게 빼앗긴 핀란드를 되찾기 위해 유능하고 강력한 군인 출신 지도자를 원했다. 베르나도트는 평민 출신으로 프랑스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1806년 뤼벡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스웨덴군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있어 스웨덴 군부의 선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가문과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의 관계가 껄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원수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 양국 동맹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 기대하며 이를 승낙했다.[469] 그러나 나폴레옹의 기대는 곧 깨졌고, 그는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469]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섭정이 되어 통치를 시작하면서 점차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스웨덴은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앞장섰다.

훗날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배은망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세 번이나 총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관대하게 처결한 이유가 베르나도트가 자신의 옛 약혼녀였던 데지레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469] 과거 나폴레옹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데지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베르나도트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470] 베르나도트는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당시 중립을 지키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쿠데타 성공 이후에도 형식적인 충성만을 맹세했을 뿐 줄곧 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1804년 베르나도트를 육군 원수로 임명하며 중용했지만, 결국 배신당하고 말았다. 한편, 베르나도트는 1818년 스웨덴 국왕 칼 13세가 사망하자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하여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471]

8. 몰락

나폴레옹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지만,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던 대륙 봉쇄령은 오히려 유럽 대륙 전체에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하고 반감을 키웠다. 봉쇄령을 강제하기 위한 스페인 및 포르투갈 점령 시도는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1812년 감행한 러시아 원정의 참담한 실패는 나폴레옹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며 몰락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유럽 동맹국들과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파리가 함락되면서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유배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8. 1. 몰락의 시작

나폴레옹의 몰락은 대륙 봉쇄령(1806년)에서 비롯되었다.[317] 1806년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에 불안을 느낀 프로이센이 영국·러시아·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며 프랑스와 대립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같은 해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806년 11월,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통해 대륙 봉쇄령을 선포했다.[432] 이는 영국과의 모든 통상 및 통신을 금지하고, 영국 선박의 대륙 항구 출입을 막으며 위반 시 몰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통해 숙적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굴복시키고, 동시에 프랑스의 대륙 경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433]

러시아에서 철군하는 프랑스군 (1812년)


하지만 봉쇄령은 예상과 달리 심각한 역효과를 낳았다. 산업혁명으로 우수한 품질의 영국 공산품 공급이 끊기자 유럽 대륙 전체에서 물자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밀수가 성행했다.[434][435] 상황이 심각하여 나폴레옹 군대조차 군용 외투와 군화를 영국에서 밀수해야 할 정도였다.[436][437] 영국 또한 대륙으로 향하는 선박을 해상에서 차단하는 역봉쇄 조치로 맞섰다.[435] 이로 인해 면화, 향신료, 설탕, 커피 등 주요 생필품 부족 현상이 극심해졌고, 이는 유럽 민중들의 고통을 가중시켜 반나폴레옹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결국 대륙 봉쇄령은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봉쇄령 위반 국가를 응징하기 위해 시작된 이베리아 반도 점령 시도는 장기적인 수렁에 빠지며 실패했고, 1812년 무리하게 감행한 러시아 원정은 혹독한 추위와 러시아군의 저항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프랑스 육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8. 2.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1812년러시아 원정 실패였다.[317]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선포하고 유럽 대륙 국가들에게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472]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러시아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1810년부터 대륙봉쇄령을 어기기 시작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1812년 5월, 약 6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473][474]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힘겨운 승리를 거두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프랑스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며 퇴각하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475][474] 러시아군은 후퇴하면서 마을과 농작물을 불태워 프랑스군이 현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을 방해했고, 추위를 피할 숙영 시설까지 파괴했다.

9월 15일, 프랑스군은 큰 저항 없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476]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러시아군은 도시 대부분을 불태우고 철수해버렸다. 점령한 모스크바는 폐허가 되어 프랑스군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은 결국 1812년 10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474] 러시아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끊임없이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실패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8. 3. 스페인 독립 전쟁

틸지트 조약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을 엄격하게 시행하기를 꺼린 포르투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145] 1807년 10월 17일, 주노 장군이 이끄는 2만 4천 명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의 동의 하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포르투갈로 진군했다. 주노는 11월에 리스본을 점령했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이미 함대를 이끌고 브라질로 피신한 상태였다.

1808년 3월, 스페인에서는 궁정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왕 카를로스 4세가 아들 페르디난드 7세에게 강제로 왕위를 넘겨주었다.[145] 나폴레옹은 이 혼란을 틈타 카를로스와 페르디난드를 프랑스 남부의 바욘으로 불러들였고, 5월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스페인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앉혔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미 12만 명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점령과 부르봉 왕가의 축출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145]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순식간에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군의 잔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 봉기는 끈질긴 저항 전쟁으로 발전했다.

7월, 조제프는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24일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정규군이 바일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제프는 마드리드에서 급히 도망쳐야 했다.[145] 같은 해 8월에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하여 21일 비메이루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결국 신트라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에서 철수했다.[145]

바일렌과 비메이루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직접 이베리아 반도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그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지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1808년 10월 에르푸르트 회의에서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와 만나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인정하고 영국에 전쟁 중단을 공동으로 촉구하기로 합의했다.[146]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발발 시 참전하겠다는 명확한 약속은 하지 못했다.[145]

1808년 11월 6일, 나폴레옹은 2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 비토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12월 4일 마드리드를 다시 점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했고, 영국군은 1809년 1월 코루냐에서 간신히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1월 17일, 형 조제프에게 뒷일을 맡기고 프랑스로 돌아갔다.[147]

나폴레옹은 1808년 원정 이후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았다. 1809년 4월, 영국은 훗날 웰링턴 공작으로 유명해지는 아서 웰즐리가 지휘하는 군대를 다시 파견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연합 정규군과 프랑스군 간의 전투가 계속되었고, 동시에 스페인 전역에서 격렬한 게릴라전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끔찍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148]

훗날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나를 망친 불운한 전쟁"이라고 회고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는 1808년부터 1812년까지 약 30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을 스페인에 묶어두어야 했으며, 이는 나폴레옹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1814년 프랑스군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이 전쟁에서 15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 사상자가 발생했다.[148]

8. 4. 라이프치히 전투

러시아 원정(1812년) 실패로 프랑스 육군이 큰 손실을 입자, 이를 지켜본 유럽 각국은 반(反)나폴레옹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프로이센이 움직였고, 주변 나라들과 함께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스웨덴베르나도트도 참여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수십만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로 청년들을 징집해야 했다. 1813년 봄, 급조된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메테르니히와의 평화 교섭이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해 크게 패배한 후 프랑스로 후퇴했다.[477]

8. 5. 파리 함락과 유배

1814년 프랑스의 정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가 이끄는 연합군 25만 명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 명이, 남쪽에서는 웰즈리 장군의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형성했다. 이에 맞서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불과 7만 명에 불과하여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결국 1814년 3월 31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다.[478]

나폴레옹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퇴위하려 했으나, 마르몽 원수 등의 배신으로 인해 무조건적인 퇴위를 강요당했다.[478]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하고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섬의 영주 자격으로 추방되었다.[477]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과거 왕정 시대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질서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로마왕 칭호를 가졌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연합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로운 왕이 되기를 원했지만 주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의 왕위를 잇게 되었다.

9.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의 재편 방안을 논의했으나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한편,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도 점차 커져갔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복위에 성공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며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고, 연합국에게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의 공격에 패배하면서[479]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막을 내렸다. 실제 집권 기간은 95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하였고,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항구가 봉쇄되어 단념해야 했다.[480] 결국 그는 영국 군함에 투항했다. 영국 정부아서 웰즐리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1815년 8월 나폴레옹을 남대서양 한가운데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481]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롱우드 저택에서 생활했다.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배치되어 그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감시했고, 집 밖으로의 외출도 제한되어 사실상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방대한 회상록을 구술하여 남겼는데, 에마뉘엘 드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 회상록들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으로, 후대의 '나폴레옹 전설'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유폐된 동안 나폴레옹은 체스영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10. 사망

파리 앵발리드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총독 허드슨 로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허드슨 로는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을 보나파르트 장군이라 부르고 썩은 포도주를 주는 등 모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또한 나폴레옹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치의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나폴레옹의 건강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나폴레옹이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82] 그의 모발에서 다량의 비소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482]

나폴레옹의 유해는 1840년 5월,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로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11. 평가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정치적 능력과 함께 권력욕과 개인적 결함이 공존하여 복합적이다.

군사적으로는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은 결정적인 패배도 있었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 자체는 높이 평가받는다. 만약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유럽 전체를 평정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나올 정도로 이 전투는 중요했으며, 나폴레옹 생애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정치 및 사회 개혁 측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법제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법을 성문화했을 뿐 아니라, 이후 서유럽,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의 법률 체계에 영향을 미치며 법 앞의 평등, 재산권 보장과 같은 혁명의 가치를 전파했다.[242][243] 그는 프랑스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프랑스 중앙은행을 설립했으며, 새로운 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1801년 콩코르다트를 통해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유기적 조항을 발표했으며,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부여했다. 군사적, 민간적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오늘날까지 프랑스 최고 훈장으로 남아있다. 그는 정복한 지역과 위성국에서 봉건주의의 잔재를 없애고, 재산권을 자유화했으며, 영지제를 종식시키고,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기 위해 상인과 장인들의 길드를 폐지했다. 또한 이혼을 합법화하고, 유대인 게토를 폐쇄했으며, 스페인 종교 재판을 종식시켰다. 교회 법원과 종교 권위의 힘은 크게 줄었고, 모든 남성에게 법 앞의 평등이 선포되었다.[243]

장-바티스트 드브레(1812)의 ''최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식, 1804년 7월 15일, 앵발리드의 생 루이 교회''


미국 하원 의사당의 부조의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고 여러 민족 운동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약 300개의 소국가로 나뉘어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을 40개 주로 이루어진 라인 연방으로 재편성했는데, 이는 프랑스의 개입에 반발하는 독일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1871년 독일 통일의 한 배경이 되었다.[244]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통일을 향한 움직임 역시 나폴레옹의 지배로 인해 촉발되었다.[245][246] 스페인 침공과 부르봉 왕조의 축출은 스페인 아메리카에 큰 영향을 미쳐, 시몬 볼리바르호세 데 산마르틴 같은 지역 지도자들이 권력 공백을 메우며 라틴 아메리카 독립 과정을 간접적으로 시작하게 만들었다.[247][248] 폴란드에서는 자국의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에서 그를 언급할 정도로 오늘날까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49]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여성을 매우 밝히고 폭력적이며 극도로 이기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귀족들뿐 아니라 그의 최후의 충신이었던 베르트랑에게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성욕과 관련된 부정부패와 아첨을 즐겨 저급한 인물들과 어울렸다고 전해진다. 반면 조제프 푸셰와 같이 냉철하고 교활한 인물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개의 헌법을 도입하며 세습 군주제와 귀족 제도를 부활시킨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12. 결혼과 자녀

1793년 코르시카를 떠나 마르세유에 정착하면서 유복한 상인 집안인 클라리 가문과 친분을 쌓았다.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1794년 8월 클라리 가의 줄리 클라리와 결혼했고,[483] 나폴레옹 본인은 마리 줄리의 여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관계가 되어 1795년 4월 약혼했으나,[484] 곧 파혼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귀족의 미망인이자 폴 바라스의 애인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1796년 3월 9일 결혼했다.[485][486] 조제핀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갖지 못했다. 1806년, 그는 의붓아들 외젠(1781–1824)과 조제핀의 친척인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1789–1860)를 입양하고 왕족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황제로 즉위한 후,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황후 조제핀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간 함께한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정략적으로 재혼했다.

마리 루이즈 파르마 공작 부인과 그녀의 아들 나폴레옹 2세, 프랑수아 제라르 작, 1813
마리 루이즈는 이듬해인 1811년 아들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 1811–1832)를 낳았고, 아들은 태어나면서 로마왕 칭호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5년 퇴위하면서 아들을 '나폴레옹 2세'로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연합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2세는 1818년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받았고, 21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250] 장인 프란츠 1세는 사위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여겨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으며,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폴레옹에게는 여러 애인과 사생아가 있었다. 엘레오노르 드뉘엘 드 라 플렌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샤를 레옹 (1806–1881)을 인지했다.[251] 또한 폴란드 정부였던 마리아 발레프스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상드르 콜론나-왈레프스키 (1810–1868) 역시 그의 자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는 DNA 증거로도 확인되었다.[252] 이 외에도 더 많은 사생아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53]

한편, 나폴레옹의 전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1798년 8월 장 베르나도트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 오스카를 낳고 나폴레옹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줄 것과 작명을 부탁하자, 나폴레옹은 '오스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487] 그러나 데지레의 남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비협조적이었고, 나폴레옹은 그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베르나도트는 1810년 스웨덴의 섭정이 된 후 점차 반(反)나폴레옹 정책을 펼쳤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었다.

13. 나폴레옹의 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키가 작은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기준으로 평균 이상의 키였다. 그의 실제 키는 167cm~168cm 정도로, 당시 프랑스 20대 군인들의 평균 키인 164cm보다 컸다. 나폴레옹의 키가 실제보다 작다고 잘못 알려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당시에는 미터법이 제정되기 전이라 프랑스와 영국의 도량형이 달랐다. 영국인들이 프랑스식 도량형으로 측정된 나폴레옹의 키를 영국식 도량형 기준으로 해석하면서 수치가 더 작게 알려졌다.
  •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키가 160cm가 채 안 될 정도로 작았는데[488], 사람들이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를 혼동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키가 작은 것으로 잘못 알게 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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